기계가 사람 흉내를 배웠다.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잊었다.
1976년, 미국 고3 학생의 40%가 재미로 6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2024년, 같은 40%의 학생이 일 년 내내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건 지표 하나의 하락이 아니다. 문명의 기초에 금이 간 것이다.
겁주려는 게 아니다. 제대로 보라는 거다.
인지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아이비리그 교수들이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에 당연히 읽던 필독서를 끝까지 못 읽는다고.
이해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집중력이 버티질 못한다.
400페이지짜리 책을 끝까지 읽는 건 여가가 아니다. 머릿속에 복잡한 세계를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긴 논증을 따라갈 때, 당신은 다중 서사를 추적하고, 만족을 지연하고, 모호함을 견디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문명의 인지 기반이 침식되고 있다. 40%의 젊은이가 일 년간 책 한 권 안 펼치면, 그들이 잃는 건 ‘독서 습관’이 아니라 복잡한 사고를 실행하는 하드웨어다.
마찰 없음은 재앙이다
AI가 고통 없는 학습 세상을 약속했다.
신경과학적으로, 이건 악몽이다.
학생들이 AI 세 개로 리포트를 쓰고, 네 번째 AI로 ‘오타’를 집어넣어 사람이 쓴 것처럼 위장한다. 게으른 게 아니다. 사고 과정에서 가장 값진 부분을 정밀하게 우회하고 있는 거다.
집중. 아이디어 연결. 논리적 추론. 이건 ‘소프트 스킬’이 아니다. 물리적인 신경 배선이다. 관련 없어 보이는 두 개념을 억지로 연결할 때마다, 시냅스가 자란다. AI에게 맡길 때마다, 그 회로는 영원히 형성되지 않는다.
마찰은 사고가 자라는 양분이다.
마찰 없이는 뇌의 발달 근육이 위축된다. 비유가 아니다. 생물학적 사실이다.
산업 시대의 계약은 파산했다
교육에는 암묵적 거래가 있었다.
정밀한 실행 기계로 자신을 훈련시켜라 → 안정적 직업과 괜찮은 삶을 얻으리라.
한국에서 이 계약은 더 구체적이었다. 좋은 학원 → 좋은 대학 → 좋은 회사. 교육열이라는 이름 아래, 수능이라는 단 한 번의 시험을 위해 수천만 원의 사교육비를 쏟아붓는 시스템.
그런데 이제 기계가 당신보다 잘한다.
생성형 AI는 보고서를 쓰고, 분석하고, 코딩하고, 번역한다. ‘표준화 가능한’ 모든 차원에서 이미 대부분의 훈련된 인간을 넘어섰다. 교육의 끝이 ‘취업’이라면, 이 시스템은 파산한 것이다.
우리는 ‘더 안개 낀 미래’로 들어서고 있다. 5년 후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유일한 피난처는 자격증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두께와 유연한 역량이다.
교육은 ‘지식 전달’에서 ‘능력 각성’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깨우는 것이다.
모범생의 승객 모드
전과목 A를 받는 학생이 교실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일 수 있다.
다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제 제때 제출, 시험 고득점, 말썽 제로. 그런데 자세히 보면, 눈에 빛이 없다.
이것이 ‘승객 모드’다. 몸은 자리에 있지만, 영혼은 이미 내렸다.
내신 만점인 학생이 수업이 너무 쉬워서 몰래 책상 밑에서 쇼핑하는 경우가 있다. 그 높은 점수는 깊은 탐구의 증거가 아니다. 고급스러운 순응이다. 시스템은 그들을 ‘성공 사례’로 분류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진짜로 참여한 적이 없다.
AI는 이런 활주를 거의 무비용으로 만들었다. ChatGPT로 10분이면 그럴듯한 리포트 하나가 나오니까. 승객 모드의 비용이 제로에 수렴한다.
순응이 지적 중퇴를 가리고 있다. 가장 보이지 않는 위기다.
네 안의 불꽃을 찾아라
Kia라는 학생이 케네디 암살 사건에 빠져들었다.
표준적인 역사 리포트를 쓰지 않았다. 방 탈출 게임을 설계했다. 단서와 증거와 타임라인을 엮어 몰입형 퍼즐 체험으로 만들었다. 이걸 위해 물리(탄도학), 프로그래밍(인터랙션 로직), 글쓰기(서사 구조)를 스스로 찾아 배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이것이 ‘Spark’다. 눈이 빛나게 만드는 것. 그걸 찾으면, 지루한 과목이 갑자기 목표를 향한 원재료로 변한다. 더 이상 떠밀리는 승객이 아니라 방향이 있는 탐험가가 된다.
Spark의 본질은 내면 의지의 각성이다. 지루하지만 필요한 연습을 자발적으로 넘게 해준다. 그게 자기가 진짜 관심 있는 곳으로 통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기계는 이걸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AI는 리포트를 대신 써줄 수 있다. 하지만 리포트를 쓰고 싶게 만들 수는 없다.
의도적 마찰을 도입하라
마찰 없음이 재앙이라면, 해법은 의도적으로 마찰을 만드는 것이다.
첫째, ‘무스크린 오아시스’를 만들어라. 물리적으로 유혹을 차단한다. 통화만 되는 폴더폰으로 바꾸는 것처럼.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기술들이 당신의 신경적 약점을 정조준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둘째, 검색 전에 손으로 그려라. AI에 뭘 묻기 전에, 종이 위에 논리 초안을 먼저 그려라. 못생겨도 좋고, 빈틈이 있어도 좋다. 그 ‘그리는’ 행위 자체가 신경 배선이 자라는 과정이다.
셋째, 주의력을 근육처럼 훈련하라. 10분의 집중 독서부터 시작한다. 핸드폰 없이, 탭 전환 없이. 매주 시간을 늘린다. 집중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훈련 가능한 생물학적 능력이다.
핵심 원칙: 혼자 생각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AI의 답을 편집할 자격이 생긴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이해’만으론 안 된다
가장 흔한 착각: 아이에게 ‘AI 리터러시’를 가르치면 된다고 믿는 것.
오레오를 생각해봐라.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안다. 고당, 고지방, 영양 제로. 그런데 눈앞에 놓이면—먹는다. 지식은 신경계를 겨냥한 설계를 이길 수 없다. 오레오의 레시피는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AI 제품의 설계도 똑같다. 무한 스크롤, 즉각 피드백, 진입 장벽 제로. 도파민 회로를 정밀 타격한다. 아이에게 “AI를 절제해서 써라”라고 하는 건 어른에게 “오레오를 절제해서 먹어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효과는 거의 제로다.
리터러시 교육만으로는 유혹의 메커니즘에 의지력이 해체된 사람을 구할 수 없다. 필요한 건 구조적 방어벽이다. 물리적 차단, 사용 규칙, 환경 설계. 개인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 프리미엄 가이드
합성 콘텐츠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구술 표현력(Oracy). 사람 앞에 서서, 즉흥으로, 논리적으로, 감정을 담아 복잡한 생각을 전달할 때—그 순간 당신은 온몸으로 증명한다. “이건 진짜 영혼이 말하고 있다”고. AI는 완벽한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거기 서서, 목소리와 눈빛으로 신념을 전달하는 것은 대체할 수 없다.
깊은 주의력. 하나의 문제에 두 시간 연속 집중하는 능력. 2026년에 이건 극도로 희귀한 능력이다. 모든 고차 인지의 전제 조건이다. 이것 없이는 연구도, 장문의 글도, 진짜 복잡한 문제 해결도 불가능하다.
의미 구성. 왜 사는지 성찰하는 것. 파편화된 경험을 방향이 있는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는 것. 인간만의 능력이다. AI는 당신의 인생을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인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할 수는 없다.
이 세 가지가 합성 시대의 ‘신분증’이다.
인간의 척도를 다시 정의한다
존 듀이가 백 년 전에 말했다.
교육은 취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민주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AI 시대에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유는 AI를 이기게 하려는 게 아니다. AI가 잘하는 영역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유는, AI가 만연한 세상에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또렷이 알게 하기 위해서다.
생각은 아파야 한다. 배움에는 저항이 있어야 한다. 성장에는 마찰이 있어야 한다.
이건 버그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소스 코드다.
지켜라.